예레미야서 이해: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Author
진실과열정
Date
2012-05-09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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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양지웅 지음

(이글은 2005년에 교회학교 교사교육을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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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

      교회학교 교사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교회학교 교사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해야만 한다(사실 많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학생의 이름을 불러가며 쉬지말고 기도해야하며, 학생과 통화나 문자를 주고 받으며 휴대폰 요금에 절반이 넘도록 투자해야 하고, 학생을 불러서 피자를 사주면서도 절대로 음식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모범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학생의 생일에는 꼭 멋진 선물로 챙겨주는 샌스까지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무엇을 더 해야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지상명령(마 28:18-20)과 바울의 유언(딤후 4:2-4)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사항을 일러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2-4)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라는 말씀에 관심을 가져보자.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화’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마 7:28; 11:1; 13:53; 19:1; 26:1에는 ‘이렇게 가르침이 끝났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가르침’에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점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물론,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이며, 이것은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디모데후서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딤후 4:2에서 가장 힘주어 읽을 단어는 ‘말씀’과 ‘전파하라’ 중에서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전파하라!’고 힘주어 읽지 않은가?) 이어지는 3-4절을 고려한다면(바른 교훈과 허탄한 이야기가 대조되고 있다), 바울은 엉뚱한 것을 전파하지 말고, 진리인 ‘말씀’을 전파하라고 힘주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렇다! 우리의 사명은 ‘말씀’ 즉 성서를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학교 교사는 교사 개인의 신앙스타일을 전수하여 자신을 닮게하는 것이 아니라(나의 제자화), 학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말씀의 제자화).

 

 

그렇다면, 성서가 무엇입니까?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듯이, 성서도 그렇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알게되듯이, 성서도 그렇다. 성서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은 눅 24:44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으로 성서를 요약했다(당시엔 신약이 없었음을 기억하라). 이것은 대대로 전해내려왔던 히브리 성서(당시엔 구약이란 개념도 없었다)의 구조적인 측면을 요약한 것이다(즉, 오경[토라]-예언서[네비임]-성문서[케투빔]으로, 첫 자를 묶어서 히브리인들은 ‘타나크’라고 불렀다). 연구자는 성서의 다른 측면에서 요약을 시도하여 소개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의 교환그림일기” 첫째로, 성서의 주제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성서의 등장인물은 하나님과 사람이다. 이 둘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존재 가치를 부여할 수 없게 된다. 둘째로, 성서는 실제적인 인간사를 다루는 일기이다. ‘성서가 거룩하다’하여, 우리 삶과 전혀 관계없는 ‘저 하늘의 것들’로 가득차야한다고 생각하면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성서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가장 실제적인 일들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하심이 들어있지 않은가?(막 6:30-44)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을 사랑하시지 않으며, 전인적인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한, 이 일기는 600만 화소의 디지털 사진이 아닌 그림일기이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지만 그림은 화가의 의도에 의해서 그려진다(캐리커쳐를 생각해 보라).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예를 역대기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역대기서는 포로생활에서 끝난 이스라엘 공동체가 ‘제사장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역대기서는 열왕기서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대상 15:2-27; 23:3-26:32). 또한, 성서는 교환일기이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반응(시편이나 예레미야애가)이 함께 있다는 말을 뜻한다. 성서는 사람의 어떠한 반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도 가르쳐준다.

 

      지금까지 성서가 ‘하나님과 사람의 교환그림일기’라는 정의는 성서의 역동적인 측면을 강조한 요약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측면을 강조하면 어떻게 될까? 성서의 비역동적 측면은, 문자적인 차원을 강조하며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교리집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다. ‘경건함’에 대한 인간본성의 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굳어버린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왜 우리는 서로 거룩하게 입맞춤하면서(고전 16:20) 인사하지 않는 것인가? 결국, 이를 굳이 구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聖經, Scripture)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성서’(聖書, Bible)로 받아들이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시종일관 ‘성서’를 언급해왔다. 사실, ‘성경’ 즉 어떠한 종교의 교리를 담고 경전으로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우리는 여기에(2층 예배당) 올라와 있을 수 없다(출 20:26). 마지막으로, 성서에 대하여 쉬운 안내서로 존 리치스가 쓴 「성서란 무엇인가」(최생열 역, 서울: 동문선, 2004)를 읽어보라.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보다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백번읽으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많이 읽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을 많이 읽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닐 것이다. 성서를 베드민턴과 비교하여 생각해보자. 누구나 베드민턴 라켓을 들고 셔틀콕을 하늘로 날릴 수는 있지만 선수들과는 게임을 뛸 순 없는 것처럼, 성서도 (누군가에게 가르칠 것인데!) 무작정 읽어내려갈 수 없다. 베드민턴에도 법칙이 있는 것처럼, 성서도 나름의 법칙이 있다는 말이다. 베드민턴에 서브와 드라이브, 스매싱이라는 ‘셔틀콕을 상대로 넘겨보내는 형식’이 있는 것과 같이, 성서도 그것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글을 기록하는 형식’이 있다. 이것을 ‘장르’라고 한다. 신약이 나름대로 이해가 잘되는 이유는 (‘짧다’는 이유도 있지만) 현대인에게 익숙한 장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편지’라는 장르로 기록된 바울의 설교문이 현대인에게는 상당히 익숙하다(인사말, 하고싶은 말, 끝말). 그런데, 구약성서는 ‘족보’, ‘제사법’, ‘시’, ‘역사기록’과 같이 현대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형식으로 되어있다. 특별히 ‘예언’ 형식은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면의 한계상 이 모든 장르들을 다룰 수는 없다. ‘장르’라는 안경으로 성서를 인도해주는 책으로 고든 D. 피와 더글라스 스튜어트가 지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오광만 역,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1)를 읽어보라.

 

      베드민턴의 초보자들은 셔틀콕을 상대방과 주고받는 것을 매우 힘들어한다. 이를 랠리(rally)라고 하는데, 이 랠리가 길어질수록 베드민턴의 맛을 듬뿍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서 이해에 있어서도 한구절만을 읽고서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구절의 앞과 뒤를 읽어야 한다. 한 절을 알기 위해서는 한 단락을 읽어야 하며, 한 단락을 알기 위해서는 한 장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문맥’이라고 한다. 요즘 나오는 성서에는 작은 소제목이 붙여있어서 문맥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15장은 문맥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15장의 진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라).

 

      베드민턴의 고수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확실히 공략할 수 있다. 상대방의 습관이나 감정을 잘 파악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인 셈이다. 이를 성서 이해 측면에서 비교해본다면, 성서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지식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서와 나와의 거리를 좁혀야한다. 시간적으로는 멀게는 4000년에서 가까이는 2000년이나 떨어져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생소한 곳일 뿐이며, 문화적으로는 원시적인 노동집약적인 농경사회라는 엄청난 차이가 성서와 나와의 거리이다. 물론, 성서가 기록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배경이 되는 정보들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예를 들면, “핸드폰 진동으로 해”라는 말을 조선시대의 이순신장군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이 말에 들어있는 엄청난 배경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특별히 구약성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먼 거리감에 있다. 그러나, 성서 자체가 역사적인 배경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실제의 삶을 안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의외로 성서의 곳곳에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이 숨어 있기도 하다(왕하 4:23에서 초하루와 안식일은 고대이스라엘인들에게 예언자를 찾아갈 수 있는 날이었다). 이 부분은 성서 뿐만 아니라 다른 참고도서의 도움이 절실하다. 비교적 짧으면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올브라이트가 쓴 「간추린 이스라엘 역사」(김정훈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8)나 J. 맥스웰 밀러와 존 H. 헤이스가 공저한 「고대 이스라엘 역사」(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와 같은 책을 읽어두면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엔 고고학의 눈부신 성장으로 수천년전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서에서 많이 등장하는 우상으로 ‘하늘 황후’가 언급되고 있는데(렘 7:18; 44:17-19), 이들의 정체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풍습이 어떠했는가를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배우게 된다(‘예레미야경’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라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書)’라는 말에서 ‘책(book)’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되면서,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레미야가 쓴 책인가? 예레미야에 대해서 기록한 책인가? 아까 말한 ‘장르’라는 것이 예레미야서에도 있는가? 있다면 무슨 ‘장르’인가? 예레미야는 누군가?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일들을 기록한 책인가? 그 때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으면서 왜 예레미야서일까? 왜 책일까? 글씨를 못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레미야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레미야서는 왜 이렇게 긴걸까? 이렇게 긴 책을 쓰다가 틀리면 어떻게 될까? 예레미야서가 어떻게 전해져서 우리가 볼 수 있게 되었을까? 왜 예레미야서가 생겨났을까? 왜 예레미야서는 이사야서 다음에 있는 것일까? 예레미야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왜 예레미야서에 대한 설교는 듣기 힘든 것일까? 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잘 모를까? 왜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어야 될까? 예레미야서가 무슨 도움이 될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말인가? 질문은 끝이 없으며, 이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오늘의 목적은 아니다. 단지, 그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에 대한 일종의 ‘거리두기’이며, 맹목적인 믿음의 차원에서부터 이해를 위한 일탈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몇가지 질문들은 우리의 예레미야서 이해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2. 예레미야서의 밑그림

 

‘예레미야서’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레미야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렘 1:1)

히브리어성서(MT[마소라 본문]라고 한다)는 ‘예레미야의 말들(디브레 이르메야후)’로 시작하는데, 중요한 말이 앞에 오는 히브리어와 그 반대인 한국어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1절 후반부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말’이 제목이 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레미야서란 쉽게 말해서 ‘예레미야의 말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히브리어성서와 비교하냐면, 우리말 성서는 히브리어성서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히브리어를 번역한 다른 나라의 말은 없을까?

 

      중요한 고대어 번역본 중에서 70인성서가 있다. 히브리어성서를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서를 70인성서(로마자 70을 뜻하는 LXX)이라고 하는데, 이 70인성서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레마)’이라고 되어있다. 우리말 성서에 보듯이, ‘하나님’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70인성서를 언급한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서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졌다’라는 인식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한글 성서를 읽을 때, 명심할 것이 ‘번역되었다’라는 사실이다. 번역이란 나쁘면 반역이며, 좋으면 창조가 된다. 예를 들어, ‘Batman Begins’라는 영화제목을 번역해보자.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옳을까? 문자적으로 ‘박쥐인간 시작하다’일까? ‘베트맨 시작하다’일까? 아니면, 그대로 ‘베트맨 비긴즈’라고 해야할까? 우리에게 소개된 영화 포스터는 번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번역’했다. 우리는 번역을 통해서 특정한 부분이 강조된 내용을 전달받게 된다(요 4:24의 ‘신령과 진정으로’가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까 제목이라고 본 ‘예레미야의 말’도 어떤 측면이 강조되지는 않았을까? 강조되지 않은 다른 뜻은 없을까? 사실, 앞에서 언급된 ‘디브레’라는 단어는 창 15:1과 18:14에서 그 의미가 더욱 넓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다바르)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창 15:1)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다바르)이 있겠느냐…(창 18:14)

창 15:1은 ‘말씀’(word)이고, 18:14은 ‘일’(event, happening)이다. 그러므로, 단지 ‘디브레 이르메야후’를 ‘예레미야의 말’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디브레’는 복수형(단수는 ‘다바르’)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들’이 정확하다. 결국, 번역자는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를 생각할 때, ‘말’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예레미야가 했던 말들과 예레미야에게 일어났던 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말들과 일들’을 만난다.

 

잠깐: 번역에 대해서

히브리어 성서가 번역되어지는 것에 대하여 두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렘 1:18과 1:11-12절이 고려의 대상이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암 하아레츠)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되게 하였은즉(렘 1:18)

1:18에는 ‘그 땅 백성’이라는 말이 나온다(34:19; 37:2; 44:21). 원어로는 ‘암 하아레츠’라고 하는데, 직역하자면 ‘땅의 사람들’이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 어떤 계층이라고 생각하는가? 문맥을 보자. 문맥적으로 볼때, 예레미야는 18절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즉, ‘유다 왕들=그 족장들=그 제사장들=그 땅 백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땅 백성’은 말 그대로 ‘땅의 사람’, 즉 땅을 소유한 사람인 ‘지주’(地主)인 셈이다. 왜 ‘지주’들도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여러분의 생각이 맞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서 여러번 등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렇게 첫 번째 번역에 대한 생각에서는, 번역된 우리말이 갖는 벗어난 의미를 지적해 보았다.

 

두 번째 구절은 번역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사항을 다룬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여호와]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렘 1:11-12)

이 짧은 두절이 하나의 신탁이었다.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살구나무가 여호와께서 말씀을 지키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일까? 안타깝게도 이 신탁은 앞뒤 정황을 전혀 알 수 없다(예언은 짧은 신탁으로 기록되어서, 그 문맥을 알기는 ‘예외적’으로 매우 어렵다). 여호와께서 살구나무를 지켜준다는 뜻일까? 살구나무가 무슨 중요한 것을 상징하는 것일까? 히브리어성서가 한글성서로 번역되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현상이 히브리어의 문학적 기교를 한글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유명한 에니메이션인 벅스라이프(Bug's life)의 한 대사를 예를 들어보자. “It's tough to be a bug” 이를 풀이한다면, “벌래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위의 영어는 의미만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표현(발음)까지도 전달하려했다(‘터프’와 ‘버그’). 이를 영화전문 번역가는 이렇게 창조했다: “곤충의 고충, 너희는 몰라” 다시 성서로 돌아가보자. 이 구절도 유사한 발음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려는 히브리어의 문학적 기교인 셈이다. 즉, ‘살구나무’(샤케드)와 ‘지켜’(샤카드)라는 단어가 발음이 매우 유사하다. 살구나무는 진짜 있는 것도 아니며, 여호와의 의지를 강조하는 ‘문학적 효과’인 셈이다. 이런 예는 렘 22:22(목자들=삼키울); 23:38-39(엄중한=온전히)에도 나타난다.

 

      70인성서를 언급한 두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이것은 ‘예레미야서가 어떻게 전해졌는가?’라는 질문과 연관된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70인성서는 히브리어성서를 번역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표기(기호)만 다를 뿐 내용은 1대 1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히브리어 디브레[רבד]가 헬라어 레마[ρημα]로 되듯이). 사실,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책들이 1대 1로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만큼은 그렇지가 못하다. 히브리어성서와 70인성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70인성서가 히브리어성서보다 1/7정도 짧다. 어떻게 짧다는 것일까? 히브리어성서 렘 33:14-26; 39:15-18은 70인성서에는 없다. 그리고, 70인성서(LXX 42:13)는 ‘주’ 즉 ‘여호와’라고 짧게 말하는 반면, 히브리어성서(35:13)는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살을 덧붙였다. 또한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70인성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4번 표현하고 있지만(그것도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사건에서), 히브리어성서는 무려 26번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히브리어성서는 군살이 붙었다는 말이다. 순서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데, ‘열방을 향한 신탁’이라는 부분이 히브리어성서(이를 번역한 한글성서)는 뒤에 나와있다(46-51장). 그런데, 70인성서는 가운데(26-32장)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하면, ‘열방을 향한 신탁’인 46-51장이 25장 13절 다음에 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사야서와 에스겔서만 봐도 ‘열방을 향한 신탁’이 가운데 들어있다(이사야 1-12 [13-23] 24-66, 에스겔 1-24 [25-32] 33-48장). 이렇게 히브리어성서와 70인성서의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심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레미야서 만큼은 70인성서가 히브리어성서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70인성서는 다른 히브리어성서를 원본으로 삼고 번역에 임했다는 뜻이다. 기원전 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예레미야서는 놀랍게도 히브리어성서 형태와 70인성서 형태로 남아있었다. 이 말은 아주 오랫동안 두가지 형태의 예레미야서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오래된 것일까? 70인성서가 더 오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한글성서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성서라는 책이 각각의 공동체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왔으며, 게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공고히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들은 덧붙여져(혹은 삭제)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군살이라는 개념이며, 이를 학자들은 ‘편집’이라는 용어를 붙인다. 그래서 편집자들의 공교한 작업이라할지라도, 종종 틀릴 수가 있다. 편집자들의 잘못된 손길이 미친 좋은 예가 렘 27:1,3에 나와있다(과연 어느 왕인가? 1절의 여호야김이 시드기야로 바뀌어야 된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예루살렘에 온 사실들의 손에도…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성서는 ‘굳어버린 교리집’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서는 닫혀있지 않았다. 성서는 아주 먼 신앙의 선배들에게 있어서 생생한 일기였기 때문이다. 신앙인들끼리도 ‘교환’(편집)해서 읽었던 일기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전의 개념이다(보존이 아니다!). 성서가 어떻게 우리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박창환 교수가 쓴 「성경의 형성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는 큰 도움이 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예레미야서란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레미야가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신앙의 공동체가 보전해 온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야서’는 예언서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예언’이라는 장르는 오늘날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낯설다. 따라서 우선 예언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잠깐: 예언에 대해서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무엇일까? 한자어로 뜻풀이를 해본다면, 예언(豫言)은 ‘미리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이 된다. 영어로 말한다면, foretell이다. 따라서, 예언하는 사람, 즉 ‘미리 (되어질 것을 알고) 말하는 사람’을 ‘선지자(先知者)’라고 말하게 된다(역시 ‘알다’라는 측면이 강조된 번역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한자어로 번역된 개념이기 때문에, 성서적 개념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예언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나비’이다. 이 ‘나비’라는 단어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출 7:1은 ‘나비’의 개념을 잘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나비)가 되리니…”

      모세는 말을 잘 못했기에, 여호와는 아론을 불러서 대신 말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아론은 모세를 대신하는 실제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보여진다(신 18:18).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대리인으로써 하나님께 부름받아, 하나님을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나비’ 즉 예언이라는 말의 뜻이다(forthtell). 그러므로, ‘예언하는 사람’은 되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는 ‘선지자’라는 단어보다는, 하나님께 부름받아 그분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예언자’가 더 바람직하다. 이후로 성서에서 ‘선지자’라고 나온 부분을 ‘예언자’라고 표기하도록 한다(한글 새번역을 참조). 어떤 측면이 강조되는가에 따라서 의미의 변화가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성서에는 다른 말은 없을까? 학자들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고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형태의 사람들이 즐비했다(소위 이들은 ‘신통한 사람들’이다). 농업이 근간 산업이었던 가나안 사회에서 잡다한 종교들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농사는 수십개의 요소들로 긴 시간에 걸친 소득행위이다! 다음의 성서구절은 가나안 사회의 종교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 18:9-11)

      이러한 종교적 행위는 예레미야 시대(렘 27:9; 29:8), 그 이후의 신약시대(행 13:6, 심지어 오늘날의 ‘왕꽃선녀님’)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여호와의 뜻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성서에는 4종류의 성서적 예언자들이 등장한다. 히브리어로는 ‘호제’, ‘로에’, ‘이쉬 엘로힘’, ‘나비’라고 하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선견자, 선견자, 하나님의 사람, 예언자이다. 각각의 단어의 의미는 약간의 차이들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비’로 통합되었음이 중요한 사항이다:


사환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 일이 있으니, 하나님의 사람(이쉬 엘로힘)에게 드려 우리 길을 가르치게 하였나이다.”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호제)에게로 가자”하였으니, 지금 예언자(나비)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호제)라 일컬었더라] (삼상 9:8-9)

      위의 성서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종교풍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삼상 9:9은 성서가 지속적으로 전수(즉, 첨가와 삭제를 말하는 편집)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초기에 예언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일을 했음을 알게된다. 사울의 나귀를 찾는 것과 같이, 세속적인 일이었다고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는 성과 속에 대해서 하나님이 찬성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예언자의 말을 ‘소유한’ 사람은 초월적인 권위를 갖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엘리사가 죽게 되자 요아스 왕이 대성통곡한 이유[왕하 13:14]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초월적 권위’를 필요로 할 것인가? 바로 왕이다.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예언자들은 왕조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사용되게 된다:


나와 너 이전 예언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렘 28:8)

      한 나라에 예언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자연스럽게, 예언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생겨났으며, 사울 왕 시대(삼상 10:5-13; 19:18-24) 이후 예언자들의 무리는 크게 증가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는 벧엘(왕하 2:3)과 여리고(왕하 2:5) 그리고 길갈(왕하 4:38)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이 예언자들로 넘쳐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시대만해도 왕궁에 있는 예언자가 400명이나 되었다.

 

      결국, 엉터리 예언자들이 넘쳐나게 되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선배 예언자 미가가 그랬던 것과 같이(미 3:5-7), 예레미야 역시 거짓 예언자들과 투쟁을 벌이게 된다(렘 23:9-40):


예언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 내가 사마리아 예언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다 … 내가 예루살렘 예언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다 … 너희에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예언자들을 내가 치리라!” …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9, 13, 14, 16, 22, 30, 36절)

      그렇다면, 어떤 예언자가 진짜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신명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예언자란 다른 신으로 예언하지 않으며(신 13:1-5), 선포된 말이 성취되어야 하며(신 18:22; 렘 28:9), 꿈과 환상에 의지하면 안되며(렘 23:25-28), 백성을 현혹해서도 안되며(렘 13:10; 28:8), 그 성품이 좋아야 한다(렘 23:14, 18, 21-22). 신명기(18:15-22)에서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예언자 하나’는 여러모로 보아 예레미야가 적임자임에 틀림없다:


“너[모세]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렘 15:16)

 

 

이제 예언이라는 ‘장르’를 생각해보자. 렘 7:1-2은 예언의 형식을 잘 보여준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예언이라는 장르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어(이것이 진정한 대언자이다)’ 선포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인류의 문화적 역사를 통해서 볼때, 예언의 형식은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었다(우리나라의 굿이 그렇다). 이러한 전형적인 예언의 방식(즉 ‘장르’)은 비이성적인 행동과 함께 나타났다. 이를 황홀경(엑스타시)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황홀경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음악에 심취하거나(성서에서도 엘리사와 같은 초기 예언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었다[왕하 3:15]) 몸에 상처를 내거나(슥 13:6) 중언부언하는(왕상 18:29) 경우가 일상적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예언자들은 더러는 특이한 행동들도 보여주기는 했지만(사 20:2; 렘 16:2; 겔 24:17), 그들의 예언내용 자체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전해졌다. 앞서 언급한 문학적 기교가 좋은 예이다.

 

      예레미야 역시 비록 약간의 예외적인 면들도 발견되지만(23:9; 51:63), 전체적으로 볼 때 다음의 내용들로 예언 장르를 분석해볼 수 있다: ①표제(렘 1:1), ②때와 장소를 가리키는 짧은 언급들(렘 26:1; 27:1; 28:1), ③예언자의 행동(렘 37-44), ④예언자의 소명(렘 1:4-10), ⑤예언자의 기도(렘 11:8-23), ⑥예언자의 신탁선포. 이것은 크게 두가지 문학적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①-③은 주로 산문(이야기식)이고, ④-⑥은 주로 시문으로 되어있다. 정리하면, 예언서는 ‘시로 표현된 예언자의 선포’와 ‘산문으로 그려진 예언자의 행동들’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서’의 특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예레미야서는 신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길다. 그리고 신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복잡하다. 예레미야서의 권위자인 R. P. Caroll은 다음과 같이 예레미야서의 특징을 요약한다(Jeremiah: 1989, 9):


예레미야서를 읽고서 혼란스럽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앞에서 문맥을 보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예레미야서는 앞뒤를 읽어봐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히브리어성서와 70인성서라는 두가지 형태가 전해져 내려왔다는 사실에서도 느껴진다. 예언 자체가 짧은 신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잘 수집해서 일목요연하게 배열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런 일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서 중복되는 것도 많이 있으며(6:13-15〓8:10-12; 11:20〓20:12; 16:14-15〓23:7-8; 23:5-6〓33:14-16; 23:19-20〓30:23-24; 30:10-11〓46:27-28; 49:19-21〓50:44-46), 그 순서도 일관되지 못하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러한 복잡함은 특별히 2-20장에서 확연하게 나타나는데, 그 어떤 배경을 알 수 없으며 짧은 신탁들이 마치 진주목걸이와 같이 걸려있다(주로 시문으로 구성되었음을 기억하라). 반대로 26-45장은 나름대로 시대적인 배경도 알 수 있으며, 특별히 45장은 예레미야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바룩’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주로 산문으로 구성되었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이 부분은 수월하게 읽어볼 수 있다. 한편, ‘열방을 향한 신탁’인 46-51장과 ‘예루살렘 마지막 역사’인 52장은 따로 두도록 하자.

 

잠깐: 편집에 대해서

      이쯤에서 예언의 편집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쓰여진 구약성서에 대해서 오늘날의 ‘저자’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가 시편의 저자를 ‘다윗’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시편에는 모세를 비롯하여(시 90) 수많은 사람들의 시가 들어있다. 72편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다윗 이전과 이후의 시대에 시편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시편의 저자는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공저’일 것이다. 그리고 시편의 완성은 포로 이후에 되었기 때문에(시 137), ‘다윗의 시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은 시편을 ‘다윗의 시편’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세계라는 전제 아래에서 볼 때, 다윗은 시편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언서가 그러하다. 렘 51:64절은 마치 여기에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끝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그리고, 이어지는 52장에는 예레미야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52장은 왕하 24:18-25:30과 똑같은 정도이다. 그렇다면, 52장은 누가 썼을까? 이러한 현상은 구약성서 전반에 나타나있다. 모세오경(창,출,레,민,신)을 모세가 썼다고 알고 있으나, 오경의 제일 마지막인 신 34장은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모세오경이 맞는가? (시편의 원리를 생각하라) 이러한 의문에 합당한 해결책은 ‘후대의 편집자’가 있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다(앞서 보았던 삼상 9:8-9가 편집[첨가]의 좋은 예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글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에 해당한다(신 31:19에 모세는 문맹일 수 밖에 없었던 백성들을 위해서 ‘노래’로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특별 계층의 사람으로 ‘서기관’이라고 한다. 서기관들은 국가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즉, 자기들의 나라가 어떻게 세워졌으며, 신(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국가신이 있었다)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록했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을 주신 ‘여호와’를 자기들의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바로 서기관의 임무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앙적 그리고 윤리적’ 명령을 잘 따르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지, 이스라엘은 실패의 길로 걸어가게 된다. 놀랍게도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약속들이 기록되어있는 신명기(신 28:36)의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신 28:48-49와 렘 5:15; 28:13-14를 비교해보라).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서기관들은 계속해서 과거의 성스러운 글들(모세오경, 예언서, 시편)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게 된다. 이들은 일종의 ‘신앙적 역사가’인 셈이며, 이들이 오경과 예언서와 성문서를 수집하고 편집하고 보전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의 깊은 독자들은 계속해서 신명기 말씀이 빈번히 인용되고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서기관들이 역사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말씀이 바로 신명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멸망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왕하 17:7-18이 신명기 말씀이었으며,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히브리어의 전기예언서)는 신명기적인 역사관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기관의 역사관을 ‘신명기적 역사’라고 말하며, 우리가 주제로 삼은 예레미야서에도 ‘신명기적 역사’의 편집이 들어있다. 한편, ‘신명기적 역사가’들의 핵심 단어는 ‘청종하라(샤마)’와 ‘돌아와라(슈브)’이며(신 4:30; 30:2, 8, 10),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신명기적인 역사’에 맞아 떨어졌던 왕이 있었으니 바로 요시야였다(왕하 23:25). 사실, 신명기적 역사관의 시작은 이 요시야왕에서 시작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슈브) 그 말씀을 청종(샤마)하리니(4:30) …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슈브)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샤마)…(30:2)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히브리어 원어는 ‘돌아오다(슈브)’)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제, 예레미야서로 돌아가보면, 36:32; 45:1은 바룩이라는 서기관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수집하고 편집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관 바룩이 …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더라(36:32)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예언과 예레미야의 행동들을 ‘여려 편집자의 손을 거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선, 바룩이라는 서기관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명기적 역사가’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신명기적 역사서인 열왕기하 마지막 장과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이 똑같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에서는 신명기적인 목소리가 곳곳에 들어있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샤마)” 하였으니,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즉, 신명기]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렘 11:7-8).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샤마)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신명기의 복약속]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하나님의 슈브)(렘 18:10)

      그렇다면, 신명기적 역사서와 예레미야서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우선 신명기적 역사의 출발점이 요시야 왕에게 있음(뒤에서 좀더 설명하겠다)을 기억하고 렘 1:2-3을 보자: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예레미야의 사역의 출발은 요시야 왕의 통치때와 맥락을 같이함을 알 수 있다. 요시야 왕 시절에 예레미야의 주된 선포의 내용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백성들을 돌이키려는데(슈브) 있었다: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네가 배역한 이스라엘의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3:6)

      예레미야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비판한다(2:20,28; 3:9; 7:18; 9:14; 11:13; 17:2; 18:15; 19:5). 예레미야의 비판이 2-20장에 몰려있음을 주목하라. 그런데, 왕하 22장과 대상 34장을 보면, 요시야 왕이 왕위에 오른지 8년에 하나님을 구하게 되고, 12년에 우상을 타파했음을 알게 된다(대하 34:8).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섬기고 있었던 우상에 대하여, 요시야 왕이 행한 우상타파는 엄청난 개혁이었다. 우상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종교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상 제도를 둘러싼 사람들의 전통(정치적 힘)과 체제(경제적 힘)라는 가치관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타파 정책에는 엄청난 반대가 그치지 않았다. 렘 44:15-19은 그러한 반대 목소리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요시야 13년에 들어와 예레미야가 우상숭배를 심판하는 예언을 하는 것은 요시야에게 있어서 엄청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왕하 22:3이하에 의하면 요시야 18년(BC 622년)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성전을 요시야가 사람을 시켜서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왕하 22:8). 왕하 22:16은 그 ‘율법책’이 신명기임을 추측하게 한다(신 28장):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제 요시야는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대로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한다. 그 개혁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예루살렘만을 여호와께 예배할 수 있는 곳을 규정하고, 다른 모든 곳을 파괴한다(신 13:12-18; 16:2,5). 특별히, 왕하 23장은 북쪽 지역인 ‘벧엘’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이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아래에서 다루도록 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만이 정당한 예배가 되었기 때문에(신 12:2-7), 각 지역에 있었던 제사장들은 하루 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되었다(왕하 23:9). 이러한 개혁의 축에 예레미야가 있었으며, 이로 인한 반대파들의 원망은 이루 짐작할 수 있다. 둘째로, 신명기의 윤리적인 삶이 실천되어졌다. 이것은 도덕적 구원을 말하는 차원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실제적인 내용의 차원이다. 여호와는 자유와 평등,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특별히 신 14:22-29는 십일조가 어떠한 측면으로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신 15:1-18은 노예 해방이라는 대대적인 인간사랑(휴머니즘은 하나님 사랑의 이면이다)이 나와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명기적 개혁이 일어난지 13년이 지난 609년에 요시야는 애굽 왕 바로느고와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고(왕하 23:29), 개혁은 쥐죽은듯이 사라지고 말았다(렘 22:13-17).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의 방향도 바뀌게 된다.

 

 

      이제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예레미야서는 주로 시문으로 된 2-20장과 주로 산문으로 된 26-45장, 그리고 그 이후의 ‘열방신탁’(46-51장)과 ‘예루살렘 멸망’(52장)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앞서 70인성서가 더 앞선 본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열방신탁의 위치인 25장을 기준으로 시문과 산문을 나눌 수 있다. 2-20장의 다양한 예언들은 예레미야의 초기 사역에 해당하며(우상숭배를 심판한다는 것은 앞에서 다루었다), 26-45장은 예레미야의 예언들과 행동들이 ‘신명기적 편집자’에 의해서 ‘산문’(편집자가 서기관이며, 이들은 전문적인 글쓰는 사람임을 기억하라)으로 재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2-25장(21-25장이 마무리글)과 뒤로 가버린 46-51장(51장이 마무리글), 그리고 26-45장이 된다. 여기에 1장과 52장은 각각 예레미야서의 제목과 후기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하게 되면, 예레미야서의 특성을 잘 파악하게 된다. 중심부분 역할을 했던 ‘열방신탁’(46-51장)이 뒤로 옮겨간 이유는 차치하고, 먼저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큰 두 부분인 2-25장과 26-45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레미야서의 목소리를 들어보도록 하자.

 

 

 

3. 예레미야서의 목소리

 

복잡하다면서, 예레미야서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합니까?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 주석이다. 주석(comment)이란, 말 그대로 성서본문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해 놓은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서는 상당히 많은 종류의 주석들이 있다. 그만큼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2-20장의 잡다한 예언들의 복합체는 논쟁의 주요 대상이 된다. 과연, 아무런 배경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재구성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나뉜다.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학자들도 서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다. 성서야 말로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볼 때에 나만의 아집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의 흐름은 예언자 예레미야 시대 상황에 맞추어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재구성해가면서 그 목소리를 들어보도록 하자. 단, 명심해야할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 자체(시문)와 후대의 신명기적 역사가의 편집(산문)이 있었기 때문에, 두 시대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예레미야 예언(행동)이 그대로 살아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행동)를 신명기적 역사가가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 어떤 면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행동)이 신명기적 역사가에 의해서 같은 방향으로 확대되어 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략하게 예레미야의 예언(행동)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해가도록 하자(다른 부분도 필요상 언급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이제, 연구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 반세기를 앞둔 상황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시대는 요시야(BC 627년)에서부터 남유다 멸망 이후의 비참한 상황(BC 585년)이다. 나라의 멸망이라는 것은 주변 나라라는 상대가 있다는 뜻으로, 남유다 뿐만 아니라 주변 고대근동의 여러 나라들간의 다양한 움직임도 같이 봐야 함을 뜻한다. 그만큼 복잡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요시야의 개혁이 그 출발점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렘 3:12을 보자: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북’은 어디인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말한다.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탈북하라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북이스라엘 왕국은 당시 패왕국(覇王國)인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멸망하고 없으며(BC 722년), 그 땅에는 포로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앗수르 총독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또한, 남유다도 엄청난 피해를 받고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예배도구를 여호와의 전에 놓아두기까지 했다(왕하 16:10-16). 이 말은 남북할 것없이 전국이 이방 나라의 신앞에서 무릎을 꿇었으며, 그들을 섬겼다는 말이다. 실제로 고위 관직들도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어가면서 정직한 통치에서 멀어졌다(렘 2:8).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이스라엘의 범죄이다(이것은 앞서 말했던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삶을 뜻한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그런데, 요시야 12년(BC 628년)에 앗수르 왕인 앗술바니팔이 사망하게 된다. 고대에 왕은 곧 신이었음을 기억할 때, 지금은 남유다에게 있어서 신앙의 독립(나라의 독립 자체가 이웃나라 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다)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요시야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대적인 개혁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영토확장에 있었다. 앞서 ‘벧엘’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실 벧엘은 멸망하여 지금은 앗수르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북이스라엘의 땅이다. 요시야가 벧엘까지 올라간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다.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은 함께한다. “북이스라엘아! 이제 돌아오라!”

 

      그러는 동안, 예레미야는 많은 적들을 만나게 된다. 그 적이란 개혁의 결과 이익이 사라진 단체에서 던지는 원망이다. 가까이는 예레미야의 친족에서부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데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하도다”(렘 11:21)

      여기서 어떻게 예레미야의 친족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렘 1:1을 기억해보라.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의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베냐민은 예루살렘 밖의 지역임을 생각해보라.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역의 제사장들이 갑자기 밥줄 끊기게 되는 개혁의 주동자가 바로 예레미야가 아닌가! 누가 책임을 져야하겠는가? 바로, 예레미야의 가족들이 ‘철부지 미꾸라지’를 잡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예레미야는 이제 가족에게서 멀어지며, 이로써 예레미야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네 형제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렘 12:6).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렘 20:14,18)

      앗수르 왕의 죽음 이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세력을 얻게 되며, 결국 바벨론이 새로운 패자(覇者)로 등장한다(612년). 바벨론은 세력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서쪽에 오래된 구렁이가 있었으니 바로 에굽(이집트)이었다. 에굽은 팔레스틴 땅에 있어서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남유다 왕국은 쉴새없이 에굽을 의지했다), 쉽사리 바벨론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609년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그 싸움에 요시야가 껴든 것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요시야는 에굽왕 바로느고의 손에 죽는다. 이 말은 반대로 요시야가 바벨론의 편이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앗수르를 벗어나려는 요시야의 의지에서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다(히스기야 왕도 앗수르보다 바벨론과 친교했음을 기억하라[왕하 20:12]). 아무튼, 이 고래등 싸움에서 에굽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요시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유다는 큰 혼란을 경험한다. 남유다는 서둘러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우지만(왕하 23:30), 에굽왕은 벌을 준다하여 ‘여호아하스’(살룸)를 잡아가고(왕하 23:33),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한 후에 에굽의 하수인으로 세우게 된다(왕하 23:34). 이제 그 밑의 권력자들도 어떻게 해야 자기 목숨이 길어질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이 어떠할지는 상상안해도 알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며 내일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죽은 자[요시야]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여호아하스=살룸]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잡혀 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22:10-12)

      에굽에 의해 왕이된 여호야김의 시대가 왔다. 에굽이 왜 여호야김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행동은 우리의 추측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회는 갑자기 후퇴하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다른 방향으로 선포한다. 지도자(권력자)들의 여호와 경외이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22:13-16)

여호와를 경외함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여호와를 아는 것에 있으며, 이는 여호와가 어떠한 분임을 알고 닮아감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는 공평과 의리를 중요시 여기신다. 여호야김과 그 지도층(여기에는 제사장, 예언자, 서기관, 그리고 ‘지주’를 포함한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꼬박 ‘성전에서 주일’을 지켰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교회 나와서 주일만 지키면’ 안전하리라! 놀랍게도 1급보험을 들어둔 오늘날의 교인들과 붕어빵이다. 이러한 상황에 예레미야는 성전에 올라갔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7:1-7, 12)

      실로가 완전히 폐허가 된 것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무너지리라!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고, 예언이 성취된 이후 후대의 편집자들도 이를 다시 기록했다(렘 26). 이 말을 들은 여호야김은 당장 사람들을 불러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들었다(렘 26: 8-24). 여호야김은 ‘청종치’ 않고 ‘돌이키지’ 않았다. 드디어 예레미야에게 들려진 여호와의 음성은 무시무시한 것으로 변하였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렘 25:1,9)

이러한 내용을 예레미야의 개인 서기관인 바룩이 적어서 왕의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으며(36장), 그 중 한사람인 여후디가 여호야김 앞에서 낭독했다(36:21). 그날은 참 추웠다고 한다. 왕은 겨울 궁전(별장)에 앉아서 따뜻한 화롯불 앞에서 턱을 괘며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36:22). 그런데 여호야김의 간은 단단히 부었다. 그는 여후디가 읽는 족족 두루마리를 잘라내서 화롯불에 던져 열기를 더했던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 뜨겁게 타올랐다.


      여호야김 시대에 또 고래싸움이 벌어졌다(BC 605년). 이를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바벨론이 대승을 거두게 되면서 서쪽구역을 접수하게 된다. 자연히 여호야김은 바벨론으로 손을 뻗쳤다. 에굽이 세운 왕이었지만 그는 줏대도 없었던 허수아비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에굽이 힘을 키우는 것처럼 보여서 다시 에굽쪽으로 기울이게 된다. 결국, 바벨론의 무서운 보복이 시작된다(BC 598년).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바벨론이 쳐들어오기 전에 여호야김은 저 세상으로 간다.

 

      왕위를 뒤 이은 ‘여호야긴’에게 모든 덤태기가 씌워졌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파상공격에 손도 못쓰고 성문을 열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왕하 24:10-16). 이 때 바벨론은 왕과 성에 살고 있는 권력자들을 포함하여 3000명을 사로잡아간다(렘 52:28).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들도 모조리 약탈하고 만다(왕하 24:13). 여호야긴의 포로됨은 다윗 왕조의 종말을 뜻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여호야긴]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 인의 손에 줄 것이라 …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렘 22:24-25, 29-30)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여호야긴의 아자비인 ‘맛다니야’를 ‘시드기야’로 개명하고 왕위에 세운다(왕하 24:17). 다윗의 혈통이 끊어진 셈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무엇인가가 달랐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렘 37:17; 38:16).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의’이다)를 인정해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바라본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앞선 22장이 요시야-살룸(여호아하스)-여호야김-고니야(여호야긴)의 순서로 남유다의 왕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명심한다면, 이어지는 23장에서 우리는 섣불리 ‘예수 그리스도’로 비약하면 안된다. 23장에서 나온 ‘가지’(즉,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의미이다)는 발음도 ‘짜디크’로 ‘시드기야’와 유사하며, ‘여호와 우리의 의’가 바로 시드기야 이름의 뜻이다. 이름처럼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진정한 ‘여호와의 공의’를 세상에 보이라고 한다. 종교적인 면에서 유월절은 요시야 때에 사상 처음으로 말씀대로 실시되었으니(왕하 23:22), 사회적인 면에서 이제는 공의의 절정인 노예해방이다. 사실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해방법(신 15)을 한번도 지키지 않았었다(렘 34:14):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34:8)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3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지만, 아직 권력자들은 충분히 건재했다. 그런데 이들은 시드기야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포로로 간 여호야긴(여고니야)이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렘 29:2). 거짓 예언자 하나냐는 공공연하게 여고니야가 돌아올 것이라고 선포했다(렘 28:4).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드기야의 자리는 흔들거렸고, 예레미야의 말을 듣는 것보다 권력자들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시드기야는 권력자들의 말을 듣고 노예해방을 취소하고 만다(렘 34:11; 37:1-2). 여호와의 분노는 이제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두려움이 되게 할 것이며,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암 하레츠=지주]을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지도자]이 없게 하리라.”(렘 34:17-22)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대적하기 위해서 주변의 나라들을 불러 힘을 모은다(27:3). 그러나, 그것은 계란‘들’로 바위치기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끝없이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권한다. 멍에를 지고가며 시위를 한다. 남아있던 권력자들에게 예레미야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방백들이 예레미야를 잡아서 웅덩이 속에 가두고 만다(37:15). 그러나, 시드기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레미야를 불러내어 여호와의 뜻을 묻고는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서 안전하게 거하도록 돕는다(38:13).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남아있는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예언자였다. 그는 바벨론에 70년간 포로가 되지만 그 후에 돌아올 것이니, 지금은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속해서 외쳤으며, 실제로 난리통속에서 밭을 사는 믿음의 실천을 보이기도 한다(32:1-44).

 

      결국, 시드기야의 반란음모는 들통났다. 노예를 해방했다가 다시 거두어들인 시드기야의 선택처럼, 하나님은 똑같이 바벨론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포위를 잠시 풀었다가 다시 바벨론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만다(렘 52:4-8). 시드기야는 눈이 뽑힌 상태로 옥살이 하다가 생을 마감했고, 예루살렘의 남은 지도자(거민)들도 하나같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586년이니 예루살렘 성은 폐허가 되어버렸고, 빈천한 국민들만이 남아서 포도원을 지키는 농부가 되었다(왕하 25:8-12). 바벨론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세워서 미스바란 곳에서 임시정부를 허락한다(렘 40:7-12).

 

      그러나, 이때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서 풀려나게 된다(39:11-14).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드디어 성취되었다! 바벨론의 군대장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 자유를 허락했다. 이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가서 높은 위치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끝까지 함께 있었다. 그가 뼈를 묻을 곳은 백성들 곁이었던 것이다(렘 40:6). 남은 일은 과연 무엇일까? 비록 오합지졸들이지만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신뢰하며 7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 남은 오합지졸들 사이에도 권력의 암투와 배신의 칼이 도사리고 있었다. 총독 그다랴는 믿었던 요하난에게 죽임을 당하고(렘 41:2), 요하난은 바벨론의 징벌을 두려워하면서 에굽으로 도망가게 된다(렘 43:7). 이 도망자들의 행렬속에 예레미야는 꼼짝없이 잡혀서 에굽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예레미야에서 우리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목소리를 대략 역사적 재구성을 기반으로 들어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예레미야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예레미야서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예레미야서 전체가 메시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몇가지 핵심사항을 뼈대로 세우는 것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뼈대를 이루는 부분을 삼으라면 렘 30:1-33:26이다. 이 부분을 학자들은 “위로의 책”이라고 한다. 물론, 부분적으로 심판도 들어있지만 전체적인 뉘앙스는 “여호와의 은혜는 과연 어디까지인가?”라고 감탄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가 많이 알고 은혜받았던 구절이 바로 여기에 들어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임마누엘!) 너를 구원할 것이라!(30:10-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1:31-34)

      위의 구절들은 예레미야 자신의 말이기도 하면서(33:1-3), 원래 상황에 선포되었던 예언을 받아서 새로이 해석해서 자신들의 신앙공동체(신명기적 율법에 순종을 강조하는 요시야 개혁의 추종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편집된 것이기도 하면서(30:10-11), 최종적으로는 (어떠한 외형적인 율법의 지킴보다도) 여호와께서 친히 함께하심으로써 은혜 아래에서 여호와를 아는 믿음의 공동체에게로까지 이어져갔다(31:31-34). 사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서 들어야할 목소리는 아직도 많이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삶은 성공적이었나요?

 

렘 1:5은 거창한 타이틀로 예레미야를 소개한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예언자로 세웠노라

      ‘열방의 예언자’가 예레미야의 타이틀이며, 그의 운명이었다. 사실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들보다 열방을 향해서 엄청난 예언을 했다(렘 46-51장). 비록, 이 부분은 다루지 못했지만,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충분히 알렸음에는 틀림없다.

 

      예레미야는 부르심에 매우 주저했다. 이는 모세의 주저함과 맥락을 같이 한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마다 예레미야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야는 독신으로 살 것을 명령받았다(16:2). 이것은 후손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며, 생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유다의 종말인 셈이다. 자신의 삶 자체가 국가의 마지막됨을 몸소 나타낸 것이다. 11-20장은 애가로 유명하다. 하나같이 애절하며, 마음 졸이는 예레미야의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정말로, 예레미야의 사역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는 사역 초기에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열방의 예언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도 못한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예레미야를 매우 힘들게 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한글성서에서 읽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 고백은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권유’는 ‘꼬드기다’라는 의미이다(출 22:16; 삿 14:15; 욥 31:19). 쉬운 말로 속였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됨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 속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통받고, 그 사역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이길 수 없었다. 여호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가슴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삶을 대표한다. 또한 이것이 교사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예레미야의 평가는 역사가 증명했다. 예레미야서는 신구약 성서중에서 가장 두꺼우며(시편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할때에 사람들은 마치 ‘예레미야’를 본 것과 같다고 했다(마 16:14)!

 

 

4. 오늘의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는 어떻게 신앙공동체에 영향을 끼쳤나요?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으로 소개해야 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모세이다. 결국, 마태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소개한다(앞서 말한 5개의 큰 가르침을 기억하라). 여기서 ‘새롭다’라는 것은 모세(율법실천적 중심의 신앙)가 할 수 없었던 진정한 구원을 이뤘다는 것을 말한다. 즉, 모세는 오직 가르침만을 남겼을 뿐이다(어찌보면 신명기적 역사가도 이 가르침만을 붙잡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르침을 뛰어넘어서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바로 십자가에서 여호와의 사람사랑하심을 몸소 보주신 것이다(모세는 자기 죄로 죽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서의 핵심 메시지와 맥을 같이 한다(한편, 마태복음에서 예레미야는 3번 등장한다[2:17; 16:14; 27:9]).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로 받아들였다. 예레미야의 분위기는 암울하다. 다음의 두 그림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그려낸 예레미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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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예레미야를 형용사는 ‘우울’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중심에 여호와의 임마누엘이 있었다(32:39-41). 예레미야는 길고도 긴 슬픈 꿈을 다 꾸고나서 다음과 같이 기지개를 폈다: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 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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